많은 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동네의 변천사
내가 사는 곳은 봉천이다. 정확히는 봉천8동 혹은 청룡동인데,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신림이라고 하기도, 서울대입구라고 하기도 한다. 서울대입구와 신림 사이에 있건만 봉천이라는 지명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혹여 아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은 자신의 고모할머니, 외할머니가 이 곳에 사신다고 말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 말하는 힙한 젊은이들의 동네와는 좀 거리가 있다.
동네 오래된 연립 주택과 집들은 노인분들의 소유가 많다. 우후죽순 생긴 편의점으로 사라진 슈퍼도 우리동네에서만큼은 건재하다. 그 덕에 재개발을 하기 위한 주민 투표를 할 때에도, 굳이 집값이 오를 것 같은 삐까번쩍한 아파트가 필요하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힘을 입어 우리 동네는 비교적 빛바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받들 봉에 하늘 천. 하늘을 받치고 있는 동네라는 뜻의 봉천이 멋지게 들렸다. 중학교 때였을까, 그 때부터도 우리 동네를 나도 모르게 애정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높은 언덕이 솟아 있는 동네에 산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저 건너편 동네를 한 눈에 내려다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동네 봉천
그러나 동시에, 하늘을 받친다는 말은 달동네라는 표현을 멋들어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봉천은 유명한 달동네 중 한 곳이다. 우리 동네는 하늘과 가까웠고 해와 달과도 가까웠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산다는 게, 그 풍경이 내 눈에만 사랑스러워보이는지도 모른다.
'봉천 이름 변경'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10년전인 2008년 뉴스들이 나온다. '저개발'과 '가난'의 상징이었던 봉천이라는 이름을 없애겠다는 취지로, 집값에 유난인 어른들은 주민 투표에 붙여 강제로 봉천동을 해체했다. 그렇게 나의 봉천8동은 청룡동이 되었다.
우습게도, 봉천동과 신림동의 이름은 유치하고 행복한 새 이름들로 바뀌었건만 지하철의 봉천역과 신림역 명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토씨 한 톨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나의 동네, '봉천'을 간직한 이름이 있다는 게 나로써는 참 좋다.
기억 속 봉천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판자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점집도 참 많았다. 비가 오면 쓰레기 뜯긴 잔해와 함께 지져분해지는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도 많았다. 노점상도 참 많았더란다. 흙냄새가 많이 나는 그 시장 골목의 기억이 점점 옅어져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도 서울대입구와 봉천역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골목들과 점집을 보면, 묘하게 찌릿찌릿한 반가움을 느낀다. 나의 기억 속 판자촌은 대부분 보살과 선녀, 장군님들로 그득차 있곤 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골목이면 으레 주황색 가로등도 자리하고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최근에 만난 내 초등학교 때 친구는 더 이상 우리 동네에 살지 않지만 가끔 할아버지를 뵈러 이 동네에 오는데, 이 동네에서 전봇대를 보는 게 참 좋다고 말했다. 요새 전봇대는 다 지하로 심기 때문에 아직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많은 전선들을 볼 수 있는 동네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녀가 사는 인천은 아마도 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겠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인천, 분당 등의 새로 만들어진 동네들은 번듯번듯 네모나고 깨끗하고 쾌적하지 않은가.
추억이 생기기 전부터도 이 곳에 살았다. 갓난애기 때 지금 사는 빌라에 이사를 왔으니 내 평생을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동네 곳곳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있다. 우리 빌라에서는 누가 어느 층에 사는지, 또 주차되어 있는 차의 주인이 누군지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도 있다. 본디 나의 성격이 잘 모르는 어르신분들께까지 인사성이 바른 성격은 아닌지라 정겹게 인사를 나누진 않지만 동네 많은 분들이 익숙한 얼굴이다. 그 분들도 내가 누구네 집 딸내미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터이다. 5분 거리의 동네 슈퍼 아저씨와는 퍽 친했었는데, 공짜로 아이스크림도 주곤 하시고 50원 100원씩 외상을 해주시기도 하셨던 분이다. 매일매일 커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시곤 했다.
달동네에 산다는 것
우연치 않게도 대학생 때나 사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좋은' 동네에서 왔었다. 서초, 방배, 양재, 압구정 등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로 다 같은 동네인양 동네에 대해서 얘기하며 서로의 친분을 돈독히 하더라. 굳이 내가 사는 동네를 숨긴 적은 없지만 사는 동네가 봉천이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낀 적도 많다. 물론 대부분은 와본 적이 없어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이고 많은 이들이 나의 동네를 신경쓰지 않지만, 간혹은 동네에 따라 나를 판단하는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차별적 시선을 떠나서도 우리 동네에서 살아온 나의 경험과 '잘 사는 동네'에서 살아온 나의 친구들의 경험은 너무나도 다르다.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라 부른 체화된 취향과 경험은 어떤 사람을 쉽사리 판단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듯이다.
그 때마다 사는 동네가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집값이 비싸지도 않고 또 비싸질 이유도 없는 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재태크 측면에서나 인적 네트워킹 차원에서 그리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더불어 500원짜리 떡볶이와 지저분한 시장, 포장마차 식의 과일가게가 백화점이나 푸드코트보다 편한 것 역시 우리 동네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백화점에만 가면 어딘가 불편하고 이상했던 기분을 내 친구들이 아닌 나만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네는 내게 동네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는 재미를 알려주었고 오래된 건물들과 오래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사람들을 꾸밈없이 대하는 법도 배웠다. 매일같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건강하게 사는 방법도 터득한 듯하다. 동네가 어떤 다이나믹과 긴장들로 구성되는지도 배웠다. 변하고 있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동네의 변천사를 보는 것은 동네가 어떤 동력에 의해 변하는지 이해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변해가는 봉천
판자촌과 점집은 사라졌다. 사라진 판자촌 터 위에는 매일밤 조명을 쏘아대는 반짝반짝한 하얀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네 곳곳에 집값이 싼 자취방을 찾는 이들의 유입으로 오피스텔 건물들도 들어서고 있다. 또 화교 및 중국 분들이 많이 이사오시면서 양꼬치와 훠궈집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저 위에 쓴 우리집 5분 거리의 동네 슈퍼도 지금은 GS25로 바뀌었다. 아저씨께서 몇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직도 희망슈퍼와, 전봇대, 작고 오래된 빌라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말이다.
변화가 없을 수는 없다. 변화가 싫은 것도 아니다.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카페가 생겼을 때처럼 말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동네가 그에 맞게 바뀌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변천사를 누군가는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나 역시도 25년간 이 곳에서 살아왔지만, 내년이 가기 전에 처음으로 이 곳을 떠나려고 한다. 첫 이사가 두근거리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평생 나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사라지는 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아직도 나의 어릴 적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이 하나쯤 있는 게 참 반갑다. 봉천이라는 달동네에 살아서, 그리고 봉천이 너무나 천천히 변해가서 나는 그것도 그래도 참 좋았던 모양이다.
이 글을 쓴 덕분에 사진기를 들고 매일 거닐던 동네를 새롭게 바라보고 찍어볼 수 있어 재밌었다. 포토 에세이 이런 맛에 하는 거였군!
Note:
이 글은 브런치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온 글입니다.